2016.10.28 04:36
** 귀에 거슬리고 가슴에 찔리는 말씀을 들으라.
나는 말씀을 들으러 교회에 나오는 사람들의 온갖 성향을 잘 알고 있다.
그들 가운데는 선하고 온전한 교리를 좋아하는 이들이 있다.
그런 사람들에게 교리를 전하면
“아, 정말 달콤하네요!”라고 말한다.
또한 예배당에 나오는 사람들 가운데는
자신의 깃털을 결대로
쓸어주는 설교만 좋아하는 이들이 있다.
만약 그들에게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에 대해 전하면
그들은 이를 바득바득 갈면서 홱
돌아선다.
그런 사람들은 복음을 들어도 유익을 얻지 못할 뿐 더러
하나님께서 기꺼이 받아주시는 경건한 무리에도 들지 못한다.
그러나 진실한 성도는 이와 달리 "진리가 제 마음을 찌른다 해도
오직 진리만을 말해줄 목사님을 원합니다!“라고 말한다.
내게는
내 몸을 정확하고 정밀하게 검사해줄 의사,
자기의 지식을 총동원해 나를 괴롭히는
질병이 무엇인지 밝혀줄 의사,
내가 몹쓸 병에 걸렸다고 솔직하게 말해줄 의사,
최선의 노력을 기울여 나를 치료할 의사가 필요하다.
그렇다. 하나님의 일꾼은 사람들의 귀를 즐겁게 하기 위해 보냄을 받은 사람이 아니다.
설교자는 사람들의 심령 깊이 성령의 검을 찌르라고 보냄을 받았지
사람들의 가려운 곳을 긁어주라고 보냄을 받지 않았다.
“그러므로 내가 선지자들로 저희를 치고 내 입의 말로 저희를 죽였노니 (호 6:5)”
사랑하는 자들이여! 진리는 귀에 거슬리고 회개를 촉구하는 말은 가슴을 찌른다.
그러므로 그런 말을 참지 못하고 경청하지 못한다면 당신을 결코 훌륭한 성도가 아니다.
또한 우리들 가운데는 아무런 준비도 하지 않고 말씀을 들으러 교회에 나오는 사람들이 있다.
실로 유감스럽게도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들이 바로 이런 부류에 속한다.
어떤 경우에 거룩하지 못한 언어를 사용하거나 누군가와 다투다가 예배당을 올 수 있고,
언짢고 성난 표정으로 올 수 있다.
이는 귀를 틀어막은 채 하나님 말씀을 들으러 오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하나님의 복을 받기 위한 올바른 경청 방법은 기도로 준비하고 듣는 것이다.
당신은 충분히 기도한 뒤에 하나님 말씀을 듣는가?
지금 우리는 하나님의 크신 복을 놓치고 있는데,
그것이 하나님께 하실 말씀을 들을 준비를 하지 않고 예배당에 나오기 때문이라고 생각하지 않는가?
내가 시골에서 말씀을 전할 때면 수많은 사람들이 말씀을 듣기 위해 집회 장소를 찾는다.
그들은 몸싸움을 마다하지 않고 사람들을 밀치고 들어와 앞자리에 앉고,
자기들에게 필요한
말씀과 축복이 되는 말씀을 꼭 듣고야 말겠다는 일념으로
입을 크게 벌린 채 내가 전하는 말씀을
다 받아 먹는다.
굴이 스스로 껍데기를 벌리니 내가 강제로 그것을 벌리려고 애쓸 필요가 없다.
이렇게 사람들이 말씀을 들을 준비를 하고 오면 그들 마음 문을 열기가 훨씬 수월하다.
그러나, 사람들이 선입견을 품고 껍데기를 꼭 닫으면,
그 날 집회에는 큰 능력이 나타나지 않고 사람들 역시 그 이유를 의아해 한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날까?
하나님께서 준비된 심령 안에서만 놀라운 은혜의 역사를 일으키시기 때문이 아닐까?
C.H. 스펄전
2016.11.02 17:57
2016.11.05 05:32
Charles H Spurgeon(1834-1892)
1834년 6월 19일 영국의 에섹스 Kelvedon에서 태어났다.
그는 프랑스의 위그노 후손이며, 그의 아버지도 경건한 독립파 교단의 목사였다.
찰스 스펄전은 태어난 지 1년 반이 되지 못하여 Stambourne에서 45년 이상 목회하던
그의 할아버지 James Spurgeon에게 가서 할아버지 수하에서 자랐다.
할아버지는 청교도 신앙을 지켜오던 비국교도 목사다.
거기서 그는 할아버지의 청교도 신학을 접할 수 있었다.
스펄전은 15세가 되던 1560년 Primitive Methodist Church의 평신도 설교자의 설교를 통하여 회심하였고,
1년 뒤 케임브리지 근교 교회 설교자가 되었다.
시골교회를 목회하던 스펄전은 기도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설교자로 준비되었다.
1854년 20세 나이로 런던 남부 New Park Street Church의 담임목사로 초빙되었다.
스펄전은 22세에 런던에서 알려진 설교자가 되었다.
1857년 10월 7일 그는 Crystal Palace에서 23,654명에게 설교하였다.
이 숫자는 그 때까지 런던 역사상 모인 최대의 숫자다.
몰려오는 청중을 수용하기 위하여 음악당으로 예배 처소를 옮겼다.
그러나 장소가 비좁아 1861년 Metropolitan Tabernacle을 건축하였다.
메트로폴리탄 태버내클은 매주 그의 설교를 듣기위해 몰려오는 10,000명의 청중으로 가득 찼다.
때로 그는 교인들에게 다른 사람을 위하여 다음 주에는 예배에 참석하지 말 것을 권하였지만,
몰려드는 사람들을 주체할 수 없었다.
그 결과 수많은 사람이 그리스도의 품안에 안겼다.
그가 부임한 1854년 232명이던 신자가 1891년에는 5,311명으로 늘어났다.
그 동안 교회에서 세례를 베푼 사람만 14,460명이나 되었다.
그는 19세기말의 위대한 청교도 신학자였다.
어려서부터 할아버지의 서재에서
존 폭스(John Foxe)의 “순교사”(The Book of Martyrs),
존 번연의 “천로역정”(Pilgrim's Progress) 같은 17세기의 청교도 경건 서적을 통하여
로마 카톨릭의 오류를 인식하였고, 철두철미한 반 로마천주교가 되었다.
특히 존 번연이 그에게 미친 영향은 대단히 커서,
그는 평생 “천로역정”을 100번 이상 읽었다.
그리고 Thomas Manton, 존 오웬(John Owen), 리차드 백스터(Richard Baxter) 같은
청교도 설교는 그에게 엄청난 영감을 주었다.